이 시 영
이시영 이사님은 현재 외교부 본부 대사이며, 서울 정동 제일교회 장로님이시다. 40년간의 외교관 생애를 통하여 외무차관, 주 유엔, 프랑스, 오스트리아, 세네갈 대사를 역임하였다. 조부님이 초기 감리교 목사님이어서 모태 신앙으로 자라났으나, 주 세네갈 대사 시절 현지 선교사들과의 영적 교제와 한인교회 개척의 경험을 통하여 선교에 대한 깨달음과 비전을 갖게 되었고, 한국 최초의 개신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1995년 창립 100 주년 기념 사업으로 세네갈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현지인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도우셨다. 주 세네갈 대사시절 감비아에서 이재환 선교사님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지난 15년간 교제를 가져왔으며, 2000년 초 귀국 후 한국 COME에 이사로서 합류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초빙교수이며, 제 4기 요나 선교학교를 이수했다. 부인은 마복자 권사, 슬하에 아들 용국과 딸 용선을 두셨는데 아드님은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고 따님은 조만간 COME/LA에서 선교사훈련을 받을 예정이다.
외교관으로 지낸 40년간의 길다면 긴 세월을 통하여 하나님은 세계의 이곳 저곳에서 참으로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셨다. 직업상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을 만나 아직도 우정을 나누고 있는 기억에 남는 친구들이 있지만 그보다는 나의 해외 근무나 공무 출장 과정에서 주님께서 특별히 마련해주신 귀한 분들과의 만남이 나에게 더 큰 도전과 비전을 던져주었다. 이렇듯 주님께서 나의 삶 속에 예고 없이 등장하게 하신 만남을 통하여 나의 영적 삶은 풍요로와 졌으며 그 만난 분들 중에는 지금도 잊을 수 없어 나의 기도 제목으로 오래 남아있는 분들이 있다.
이재환 선교사님과의 첫 만남은 15년 전 여름 어느 날 참으로 우연처럼 이루어졌다. 1985년 주 세네갈 대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겸임 국인 감비아의 수도 반쥴에 가서 그 나라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게 되었다. 그 동안 아내는 식료품을 구하려고 시장에 나갔다가 우연히 갓난 아기를 데리고 온 한국 부인을 만났고 그 분이 바로 이선교사님 사모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함께 점심을 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이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우리들 사귐의 첫 시발이었다. 당시 WEC 소속이었던 이선교사님은 1984년 감비아에 입국하여 시바놀이라는 벽촌에서 사역 중이셨는데, 그와 그의 가족의 선교사로서의 소박하고 헌신적인 삶의 모습이 모태 신앙으로자라난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도전이 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땅끝까지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선교 사명을 이미 받은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었다.
내가 세네갈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떠나오게 되었을 즈음해서 이선교사님은 WEC을 떠나 독립선교부를 만드셨으며, 앞으로 ''가나안 젊은이 센터''를 만들어 감비아 청소년들에게 직업 훈련과 더불어 신앙을 심어준다는 비전을 갖고 계심을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나는 이선교사님께 그 구상에 관한 계획서와 예산서를 보여 주시면 도와드릴 방법을 강구해 보겠노라고 했더니, 그는 웃으시면서 필요한 것은 기도니까 그저 기도만 열심히 해달라고 부탁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기도밖에 해드린 것이 없었지만,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2년여에 걸친 온갖 고생과 수고 끝에 마침내 ''가나안 젊은이 센터''가 완공되었는데, 그 건축과정에서 꼭 필요했던 땅, 우물, 공구, 콘테이너, 시멘트, 철근, 창살, 지붕, 발전기 등 모든 필요한 것들을 그때 그때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공급해 주시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교 사역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을 수없이 듣고 보면서, 주님은 그 분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는 종에게는 그의 사역에 필요한 것들을 책임지고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의 선교(faith mission)의 산 증거를 목격하도록 해주시었다.
1994년 비엔나에서 주 오스트리아 대사로 일할 무렵 카메룬에서 열린 UNIDO 년차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감비아에 들러 브리카마에 있는 이선교사님의 가나안 젊은이 센터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기도 중에 늘 보고 싶었던 센터이기도 하고, 마침 딸 용선이가 단기 선교사로 섬기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감개 무량한 마음으로 다시 감비아 땅을 밟았던 것이었다. 선교센터는 이제 무르익어 학교 사역과 교회사역 등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고 선교사님들이 감비아 청소년들과 공동생활을 하며 사는 모습이 귀하게 보였다. 또한 선교사님들의 모습을 닮으며 자라나고 있는 감비아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교역자 후보생들을 만나 본 것은 참으로 흐뭇한 경험이었다.
카메룬 출장 중에도 주님은 1986년 선교선 "둘로스"호가 세네갈을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났었던 윤원로 선교사를 상봉하도록 준비해 주셨다. 그는 수도 야운데와 항구도시 두알라에 각각 원주민 교회와 챠드 피난민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계셨는데, 그날은 야운데 시내의 챠드 피난민 촌에 개척한 판자촌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약 200 명 가량의 챠드 피난민들로 꽉 찬 뜨거운 텐트 안에서 드리는 예배였는데 윤선교사의 열띤 프랑스어 설교, 가운을 입은 성가대의 힘찬 찬양, 피난민들의 정성어린 헌금과 예배 후 모든 교인들과의 악수 등으로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가난의 바닥을 헤매는 이들 피난민 교인들이 하나씩 앞으로 나와 헌금을 드리는 모습은 정말로 눈물겨웠다. 무엇보다도 나를 감동시켜 준 것은, 고국인 챠드에서는 복음을 전혀 접하지 못했던 미전도 종족인 그들이 리비아와의 전쟁에 쫓겨 카메룬으로 도망 나와 피난민 촌에서 너무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다름 아닌 한국 선교사에 의해 기쁜 구원의 복음을 접하게 되고 그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995년 남태평양 국가들과의 첫 번째 대화 포럼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석 차 파푸아뉴기니를 방문했을 때도 주님은 내지에서 성경 번역에 종사하고 있는 GBT(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님들과 기술원 사역을 하고 계신 수녀 선교사님들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다. 이 만남을 위해내지에서 경비행기로 일부러 수도까지 나와 준 GBT 선교사 한 가정의 경우는 딸 둘이 모두 말라리아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웠는지 모른다. 그들을 점심에 초대하여 대접하면서, 파푸아뉴기니에는 200여 종족이 서로 다른 언어를 갖고 있어 이들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경 번역 사역이 얼마나 절실하고 시급한지를 알게 되었으며, 한국의 여러 선교사 가족들이 성경 번역 사역을 위해 이들 부족들이 살고 있는 오지에 들어가 여러 해 동안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같은 해 한-튜니지아 경제협력회의 참석 차 튀니스를 방문했을 때는 대사관에 부탁하여 교포 중 교인들을 호텔로 초대하여 함께 기도회를 가졌는데, 그 나라 내륙의 미전도 종족인 X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성경 번역 사역을 하고 있는 GBT 선교사 한 가정과, 모슬렘 선교를 목표로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와 있는 단기 선교사 자매 몇 사람이 왔다. 호텔 방인지라 찬송가도 맘놓고 크게 부르지 못하고 함께 통성 기도를 하는데, 자매들은 이렇게 함께 모여 찬송과 기도를 한지가 너무 오랜만이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슬람권에 대한 선교의 꿈을 안고 외롭게 분투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모습이 참으로 감동스러웠다.
1996년 파리에 주 프랑스 대사로 근무할 때에도 아프리카에서 사역하고 있는 우리 선교사님들을 접촉할 기회가 있었는데, 특히 모잠비크의 소코라는 지역에 교회와 훈련 센터를 개척하여 수고하시는 이은택 선교사님을 그의 집회에서 만나 그 지역 사역에 관하여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보내오신 이메일에 의하면 소코의 일부 지방 사람들이 경찰과 짜고 이선교사님을 무고하여 이선교사와 원주민 사역자들 및 신학생들을 쫓아내고 센터와 땅을 빼앗으려 음모 중이라고 하며, 또한 이선교사 가족이 체류하고 있는 국경 넘어 짐바브웨에서도 갑자기 퇴거 명령을 당하여 온 가족이 황급히 피신했다고 한다.
이렇듯 세계 구석 구석, 특히 어려운 미전도 지역에 들어가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며 박해 당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님들과 만나 본 체험은 나의 직업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너무도 소중한 영적 전환의 기회요 도전이 되었다.
이재환 선교사님이 감비아 선교 초기에 들려주셨던 얘기가 새삼스럽다. 시바놀이라는 벽촌에 한 감비아 노인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님들의 뒤치닥거리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이 너무도 이해할 수 없어서 한번은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 물어 보았다는 것이다. 그 노인이 대답하는 말이, "당신들이 너무 늦게 왔기 때문이요(because you came too late)"라 하더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머무적거리고 주저하는 만큼, 수도 없이 많은 미전도 종족의 영혼들이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채 구원의 기회를 영원히 잃으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전도 종족에게 한 사람의 선교사라도 더 가서, 한 영혼이라도 더 늦기 전에 구원할 수 있기를 열망하고 계시며, 이를 위해 세계 여기 저기에서 선교의 일꾼을 찾고 계시며 또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100여 년 전 암흑과 혼돈에 휩싸인 은둔과 쇄국의 나라, 한국이라는 미전도종족에게 20대 후반의 젊은 미국 선교사들을 보내시어 복음의 씨를 뿌리게 하셨다. 26세의 언더우드, 27세의 아펜젤러 내외, 28세의 스크랜튼 내외와 그의 어머니가 1885년 한국 땅에 디딘 아름다운 발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자유롭게 받아 드릴 수 있는 민족이 된 것이다. 그후 1900년대 초의 부흥기를 거쳐 주님께서는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본 식민지 통치의 박해와 고통을, 국토 분단과 동족 상잔의 뼈아픈 비극과 엄청난 파괴를, 경제 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우상 숭배와 타락의 시련을, 그리고 한국교회의 괄목할 성장을 주시면서, 우리 민족을 마지막 때 복음 전파의 사자로 쓰기 위해 정금같이 단련시켜 오셨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부터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세계 곳곳으로 흩으시기 시작하셨는데, 21세기의 문턱에 선 오늘날 세계 5대양 6대주의 어느 곳을 가도 한국 사람들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세계의 복음이 미치지 않은 곳에 선교의 일꾼을 보내기 위한 기지와 네트워크를 주님께서 형성하시는데 우리가 참여할 준비를 갖추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1980-90년대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겪은 많은 경험과 시행 착오를 거울삼아 본격적인 선교사 양성, 새로운 선교 전략의 수립, 선교 지원 체제의 정비, 파송 교회의 각성과 국내외 선교 기관간의 유기적 협력관계의 확립 등의 다양한 준비를 착실히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음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COME이 특별히 미전도종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 기관으로 새로 출범하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실현시키시려는 우리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 COME이 이 시대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