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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선, 단순다수결제도는 과연 옳은 것인가?

FC설레발 2008. 3. 15. 01:08

과거 한국의 대선을 돌이켜 볼 때, 당선자가 유권자의 과반수이상을 획득하고 당선한 경우는 몇 차례에 불과하다. 자료를 보면, 간선제를 제외한 직선제 하에서, 50% 이상의 득표로써 당선된 경우는 2,3대 이승만 대통령, 6,7대 박정희 대통령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승만 대통령 당시는 한국민의 정치의식이 신민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때라고 보아도 좋고,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당시에도 신민당 김대중 후보와의 격차는 한자리수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한국의 대통령은 언제나 ‘반쪽짜리’ 대통령이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이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국민들의 지지일 것이다. 그런데 권력이 국민 절반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상황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정당성이 부족한 권력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당성이 부족한 권력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첫째로, 국민 여론의 분열과 그에 따라 정책결정과정에서 비효율성을 노정하게 된다. 어떤 대통령이 40%의 지지로써 당선되었다면, 그것은 곧 60%의 유권자는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통령은 당선 이후에도 끊임없는 반대 여론에 시달리게 되고, 국론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가 정책결정자의 측면에서 보면 비효율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둘째로, 집권세력의 성과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단기적 성과주의에 입각한 무리한 정책결정이 이어질 수 있다. 과거 박정희 정권이 독재정권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 국민이 박 정권을 칭송 내지는 희구하는 이유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경제발전이라는 성과 때문이었다. 결국 그것은 박정희 정권이 태생적 정당성 결여를 사후적인 성과로써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의 연임이 가능했고, 비록 비민주적 방법이긴 하지만 종신 임기를 보장받은 것이 경제적 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임제가 확립된 1988년 이후의 정권부터는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정책적 성과를 거두기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 정권이 단기적 성과에 급급하다가 부정적 결과를 남기고 퇴장하는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따라서 프랑스식의 절대다수결제를 대선에 한하여 도입하는 방안을 생각해 본다. 절대다수결제를 통해 50% 내지는 나아가 70% 이상의 득표로 대통령이 당선되어야 한다면, 각 후보자들은 최대한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만약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2차 투표로 가기까지의 정치적 상황은 곧 국론 통합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득표율의 절대적 우위라는 숫자적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1차 투표 이후 탈락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차선의 후보를 생각하게 되고, 그를 지지하게 됨으로써 정당, 혹은 다수 후보자 중심의 분열된 여론이 서서히 소수의 후보자 중심으로 통합되는 결과로 자연스레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정치계의 고질적인 지역주의도 해결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영남에서의 압도적 득표, 또는 호남과 충청에서의 압도적 득표를 확보해 놓고, 수도권에서의 근소한 우세를 노리는 방식의 선거 전략은 의미가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국민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권은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정책 추진에 있어서도 좀 더 고른 국민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정책 추진 이전단계에서의 비효율성을 어느 정도 감소시킬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비록 절대다수결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새롭게 발생할 비용도 클 수 있지만, 이러한 제도적 도입으로 국가적인 비효율성을 치유하고, 국론 분열의 문제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분열된 국론을 토론과 합의로써 통합하기 보다는, 수적 우세와 물리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후진적인 국회 의사결정문화와, 일부 시민사회의 의사결정문화를 고쳐나가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하겠다.